상단여백
HOME 클릭핫이슈
"여성들은 당당하게 앞을 보라"…여성운동가 이희호의 삶
11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고 이희호 여사의 빈소에 영정이 놓여있다. 2019.6.11/뉴스1 © News1 이승배 기자


(서울=뉴스1) 김성은 기자 = "나는 걸음걸이가 빠르고 행동이 남성적이었어요. 그래서 '다스'(das, 독일어의 중성 관사)라고 불렀지요."

10일 별세한 고(故) 이희호 여사는 생전에 남긴 '이희호 평전'에서 서울대 사범대에 다니던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다스'는 행동만 봐서는 남성인지 여성인지 구분하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붙은 별명이다.

이 여사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학생들로부터 서슴없이 "누님"으로 불릴 정도로 당찬 성격을 지닌 여학생이었다. 통학열차 안에서 그는 즉석 연극을 하기도 했다.

"신입생 환영회 같은 행사에 남녀 학생들이 같이 모이면 남학생들은 맥주를 사다가 마셔요. 그런데 여학생들은 남학생들 앞이라고 수줍어서 과자도 제대로 집어먹지 못하고 고개만 수그리고 있어요…그런 모습을 참을 수 없어 후배 여학생들에게 고개를 똑바로 들고 당당하게 앞을 보라고 했어요."

이 여사가 기독교학생운동에서 활동할 때 자신의 이름(희호)를 본떠 '히히호호'라고 크게 웃으며 자기소개를 했다는 일화도 남아 있다.

이후 이 여사는 여성인권운동에 큰 족적을 남긴 1세대 여성운동가로 성장한다. 그는 이화여자전문학교(이화여대 전신)와 서울대 사범대를 거쳐 미국 유학을 다녀온 뒤 당대 엘리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여성 인권운동에 매진한 신여성이었다.

1953년 전쟁통에 부산으로 피신했던 이 여사가 했던 일도 여성이 주체가 된 청년단체인 대한여자청년단을 결성하는 것이었다. 1952년에는 여성문제연구원(현 여성문제연구회)을 창립하고 남녀차별 법조항을 철폐하는 일에 주력했다.

이후 여성문제연구원의 남녀차별 철폐운동은 1989년 제1야당인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의 주도 하에 가족법 개정으로 이어졌다. 이혼 배우자의 재산분할 청구권 신설과 부모 친권의 공동 행사 등 기존의 여성차별적인 법조항이 바뀌었다. 이와 관련해 이 여사는 "가족법 개정은 내 평생소원이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1954년 미국 유학길에 오른 그는 스카릿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친 뒤 고국으로 돌아온다. 유학을 거치며 활달했던 이 여사는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는 차분한 성격으로 변화했다고 한다.

이 여사는 1959년 대한YWCA연합회 총무로 활동하며 첫 캠페인으로 '혼인신고를 하자'는 캠페인을 벌였다. 당시 일부다처제로 인해 결혼을 하고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여성들이 하루아침에 집 밖으로 쫓겨나는 일을 방지하고자 했다.

이후 1962년 김 전 대통령과 부부의 연을 맺으면서 이 여사의 삶의 행보에도 변화가 온다. 박정희 정권시절 납치 사건과 전두환 정권의 사형 선고, 가택연금에도 묵묵히 김 전 대통령의 곁을 지키며 '조력자'이자 '동반자'로서 김 전 대통령의 정치 역정을 함께 한다.

김 전 대통령이 1997년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엔 청와대에 입성해 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해 꾸준히 활동했다. 이 여사의 영향을 받은 김 전 대통령도 취임 이후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와 여성부를 신설하고 정부 6개 부처에 여성정책 담당관실을 설치한다.

국민의 정부 시절엔 가정폭력방지법(1998년)과 남녀차별금지법(1999년)이 시행되기도 했다.

이 여사는 2009년 남편을 떠나 보낸 뒤 남북평화를 위해 기도했다고 한다. 그는 장남 김홍일 전 의원이 지난 4월 별세한 지 두달여만인 지난 10일 눈을 감았다.

그는 '이희호 평전'에서 자신의 삶이 아래와 같이 기억되길 원했다고 한다.

"여성의 인권을 존중하고 높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편과 함께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한 길을 걸었다는 것을 기억해주었으면 합니다."

뉴스1 <뉴스커넥트>를 통해 제공받은 컨텐츠로 작성되었습니다.

편집부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