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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칼 꽂힌 듯…" 박근혜 운명가른 10장면

"심장에 칼 꽂힌 듯…" 박근혜 운명가른 10장면

  • 기자명 국회일보
  • 입력 2012.12.20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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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운명 가른 10장면 <상>
34년 만에 청와대 돌아가는 대통령 딸

▲ 1976년 봄, 청와대 뜰에 나란히 함께 선 박근혜와 박정희 대통령. [중앙포토]
박근혜가 34년 만에 청와대로 돌아간다. 박근혜는 1979년 11월 21일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의 9일장을 치른 뒤 두 동생 근령·지만과 쓸쓸히 청와대를 떠났다. 그가 2013년 2월 25일 국민의 환호 속에 18대 대통령으로 청와대에 입성한다.

 한때 교수를 꿈꾸던 대통령의 딸이 한국의 첫 여성 대통령이 되기까지 박근혜가 걸어온 삶의 궤적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부모를 모두 흉탄에 잃었고, 자신도 목숨을 앗아갈 뻔한 테러를 당했다. 야당 대표를 지냈지만 대선 경선에서 패배한 뒤 비주류의 설움도 톡톡히 겪었다. 박근혜의 운명을 가른 열 장면을 골라봤다.

① 1974년 어머니 피격 사망

 박근혜는 74년 서강대 전자공학과를 졸업한 뒤 프랑스 그르노블대의 어학 과정에 들어갔다. 그해 8월 박근혜는 친구들과 여행 도중 대사관 측으로부터 급히 귀국해야 한다는 연락을 받고 하숙집으로 돌아갔다. 대사관 직원들은 어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만 할 뿐 명확하게 설명하지 않았다. 불길한 예감 속에 드골 공항에 갔다가 가판대에 꽂힌 신문 제목을 통해 어머니의 죽음을 알게 됐다. ‘Madam Park, Assassinated(육 여사 암살되다)’.

 당시 상황에 대해 박근혜는 “날카로운 칼이 심장 깊숙이 꽂힌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고 회고했다. 귀국 비행기에서 내내 울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박근혜에겐 새로운 역할이 주어졌다. 22세의 퍼스트 레이디였다. 박근혜는 유신 정권에서 5년간 퍼스트 레이디로서 각종 행사를 주관하면서 국정을 보는 식견을 키워 갔다. 박정희 대통령과 아침식사 때는 조간신문을 놓고 시사토론을 벌였다. 박 대통령은 장녀가 지도자의 자질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② 아버지마저 총탄에 잃어

 79년 10월 26일 박근혜는 다음 날 빡빡한 일정 때문에 평소보다 일찍 잠에 들었다. 다음 날 새벽 1시30분쯤 전화벨 소리에 잠이 깼다. 잠시 후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이 관저로 찾아와 “각하께서 돌아가셨습니다”라고 전했다.

 이때 박근혜가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전방에는 이상이 없습니까”라고 물었다는 것은 그의 안보관과 관련해 외국 언론에까지 인용된 유명한 일화다. 다시 찾아온 부모의 비극에 박근혜는 극심한 충격을 받았다. 박근혜는 피 묻은 아버지의 넥타이와 와이셔츠를 빨면서 오열했다.

 박근혜는 그해 11월 청와대를 나와 부모가 살았던 서울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갔다. 박근혜는 아버지가 쓰던 낡은 책상에 앉아 전국 각지와 외교 사절들이 보낸 추모 편지를 읽고 일일이 답장하는 일로 소일했다. 박근령은 “어쩌다 외출에서 돌아오면 언니는 혼자 TV문학관 같은 프로그램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고 회고했다.

 염량세태(炎凉世態)는 박근혜의 가슴속 깊이 ‘배신의 트라우마’를 새겼다. 아버지 살아생전엔 깍듯하게 대하던 사람들이 세상이 바뀌자 언제 봤느냐는 식으로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그는 당시 일기장에 이런 글을 남겼다.

 “지금 상냥하고 친절했던 사람이 나중에 보니 이(利)에 기가 막히게 밝은 사람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덧없는 인간 사이다.”(81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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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대구 달성서 정계 입문

 박근혜를 세상에 다시 불러낸 것은 1997년 외환위기였다. 그는 “외환위기 이후 일련의 사태를 지켜보면서 ‘나라가 이렇게 흔들리는데 나 혼자만 편하게 산다면 죽어서 부모님을 떳떳하게 뵐 수 있을까’란 질문이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고 말했다. 97년 12월 10일 15대 대선을 8일 앞두고 박근혜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지지를 선언하고 정치에 투신했다.

 한나라당이 대선에서 패배하자 1998년 4·2 재·보선은 당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선거가 됐다. 박근혜는 원래 아버지가 젊은 시절 교편을 잡았던 문경-예천 출마를 마음먹었다. 하지만 당에서 판세가 만만찮은 대구 달성 출마를 요청해 오자 박근혜는 군말 없이 수락했다.

 국민회의가 달성에 내보낸 엄삼탁 후보는 만만찮은 상대였다. 정권 초라 자금과 조직을 앞세운 여당 후보의 프리미엄도 컸다. 당시 달성 선대위원장이던 강재섭이 “선거자금이 얼마나 있느냐”고 묻자 박근혜는 간단히 “없습니다”라고 말해 강재섭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대신 박근혜는 하루에 10만 보 넘게 걸으면서 유권자들과 대면 접촉을 늘리는 데 전력투구했다. 막판까지 여론조사에선 계속 밀렸지만 박근혜는 여론조사에 안 잡히는 ‘바닥 민심’의 힘을 믿었다. 결국 뚜껑을 열어 보니 박근혜의 완승이었다. 정치공학을 멀리하고 바닥 민심에 직접 호소하는 박근혜의 정치 스타일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④ 2002년 김정일 면담

 박근혜는 2002년 5월 11일부터 3박4일간 평양을 방문했다. 유럽-코리아재단 이사 자격으로 북한 민족화해협의회의 초청을 받은 것이다. 당시 그는 이회창과의 갈등 끝에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한국미래연합 창당을 준비하고 있었다. 김정일은 자신의 전용기를 중국 베이징으로 보내 박근혜를 태워왔을 정도로 극진한 예우를 했다. 5월 13일 저녁 김정일이 예고 없이 박 전 위원장이 머물던 백화원영빈관을 찾아왔다. 박정희의 장녀와 김일성의 장남 사이에 이뤄진 역사적 회동이었다.

 두 사람은 속기사 한 명만 배석한 상태에서 한 시간 동안 면담했다. 박근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솔직하고 거침없는 사람이었다. 화법과 태도는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김정일은 68년 북한군 특수부대의 1·21 청와대 습격사건에 대해 “당시 극단주의자들이 일을 잘못 저질렀다. 미안하게 생각한다. 그 일을 저지른 사람들은 다 응분의 벌을 받았다”고 사과했다. 박근혜가 “답방을 하기로 했으니까 그 약속을 지키면 어떻습니까”라고 하자, 김정일은 적당한 기회에 가겠다고 하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를 참배하겠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⑤ 천막당사 ‘선거여왕’으로

 2004년 3월 24일 한나라당 대표로서 처음 출근한 박근혜는 여의도 국회 앞의 10층짜리 당사 건물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대신 당원들과 함께 당사 입구의 현판을 떼어낸 뒤 1㎞ 정도 떨어진 여의도 중소기업전시장 부지의 천막 당사로 들어갔다. 당시 한나라당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역풍으로 침몰 직전이었다. 총선에서 50석도 어렵다는 여론조사도 나왔다.

 구원투수로 등판한 박근혜는 당의 통렬한 반성을 상징하는 이벤트로 소장파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천막당사로 당을 옮겼다. 당직자들은 황사를 막기 위해 마스크를 쓴 채 근무했고, 곳곳에서 빗물이 새는 통에 양동이를 받쳐야 했다. 혹독한 반성의 시간은 84일간 계속됐다. 선거운동 기간 박근혜는 “부패·기득권 정당에서 벗어나겠다. 마지막으로 한번 기회를 달라”며 읍소하며 전국을 누볐다. 악수를 너무 많이 해 손이 붓는 바람에 선거 닷새 전부턴 오른손에 붕대를 감고 다녔다.

 총선에서 한나라당은 121석이라는 예상 밖의 선전을 거두며 기사회생했다. 박근혜가 보수 진영의 새 아이콘으로 확고히 자리를 잡는 순간이었다. 박근혜는 그해 6월 염창동으로 당사를 옮겨서도 ‘천막당사 정신’을 강조하며 각종 개혁을 진두지휘했다.

박근혜 운명 가른 10장면 <하>

⑥ 2006년 신촌 테러
⑦ 2007년 경선 승복
⑧ 2010년 세종시 본회의 연설
⑨ 2011년 비대위원장 복귀
⑩ 2012년 과거사 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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